더 좋은 알곡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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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3: 24∼30 |
둘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 30) | |
[그림QT] 십자가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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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치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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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에서 본 글입니다. “완벽한 교회를 찾지 마라. 그런 교회는 찾지도 못할 뿐 아니라 만일 찾는다 해도 그 교회가 너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현재 저는 교구에 속한 기관에 근무하기 때문에 여러 교회에 가서 설교하고 성찬례를 집전할 기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교회가 주는 다양한 모습들에 때로는 기쁘기도 하고 때로는 슬퍼지기도 합니다. 어떤 곳은 교인들과 목회자가 하나가 되어 활기차고 기쁨이 넘치는 반면, 어떤 곳은 성직자와 교인 간에 또는 교인과 교인 간에 갈등하는 모습들이 은연 중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갈등 중에 있는 교회는 성장하거나 성숙하지도 못하고 심하면 와해될 위기 가운데 있어서, 교회가 왜 감사와 기쁨이 넘치지 못하고 이런 갈등과 고민에 시달려야 하는지 안타깝게 생각됩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교회의 이러한 어두운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에는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의 기쁨에 감사하고 헌신·봉사하는 신자들만 있는 곳이 아니라, 외형적으로는 신자이지만 내면적으로는 교회를 훼방하는 가라지들이 함께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라지들은 세상 끝날까지 그 처리가 유보되었습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이 상할까 하나님께서 염려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진짜 가라지와 일시적으로 가라지처럼 보이는 가라지 아닌 가라지도 있어서일 것입니다. 분명 알곡 신자인데 가라지의 영향으로 자라지 못하고 때로는 가라지와 함께 엮여있어서 가라지를 제거하다보면 이들도 함께 제거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지요(29절).
올바른 신앙인들은 교회의 불완전한 모습에 낙심하고 이 교회 저 교회 순례하는 이들이 아니고, 지금 있는 교회에서 가라지들을 참고 견디면서 도리어 그 힘으로 성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가라지의 부정적인 요소가 완전히 사라지기를 바라기보다는 그 부정적 요소 때문에 오히려 긍정적인 요소들이 더 강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상의 교회로서는 최선의 방책이 됩니다. 만일 부정적인 것들을 제거하는 데만 주력한다면 결국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만을 주게 될지도 모릅니다. 가라지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맡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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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가라지를 참고 견디며 오히려 더 좋은 알곡으로 거듭나는 우리와 교회가 되게 하소서. 아멘.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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