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어릴 적엔 소풍을 갈 때 어머님이 용돈을 얼마 주셨게요? 50원? 100원? 아닙니다. 10원짜리 하나 줬어요. 그 땐 10원도 작은 돈이 아니고 50원이면 제법 큰 돈이었습니다.
어릴 적에 꼭 한번 어머님 돈을 훔쳐 과자를 사 먹으려 한 적이 있는데, 50원을 훔쳐서 가게로 가니 큰 돈이라 가게 주인 아주머니가 벌써 훔친 거 알고는 과자를 안 주더라구요. 과자도 못 먹고 들통 나 혼만 실컷 났습니다. 훌쩍 ^^
돈 10원 들고 소풍 가면 당시엔 아이스케끼라고 부르던 하드 하나나 과자 한봉을 사 먹곤 했습니다. 한 번은 그 귀한 10원짜리를 잃어 버려서 소풍가서 맛난 것도 못 먹고 혼자 손가락 빨면서 홀짝홀짝 거리던 기억도 납니다 ㅎㅎ
돌아보면 전기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고, 먹거리도 부족해서 보리밥, 고구마 죽, 명절에나 쌀밥 구경, 명절 때라야 겨우 애 잡듯 부모님들이 목욕시키던 어린 시절은 마치 구석기 시대처럼 느껴집니다. 먹거리도 부족해서 음료수는 사이다나 환타, 라면은 삼양라면, 과자는 뽀빠이 하나 정도였지요.
오늘날은 얼마나 모든 것들이 풍성해졌는지, 라면만 해도 수백 가지요, 가끔 가게에 들러 음료수라도 사 먹을라치면 어느 것을 먹을까 머리가 아픕니다^^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릴 뿐이지요.
기본적으로 음료수는 각종 첨가물이 들어가서 몸에 좋지 않아 가능하면 삼가면 좋지만, 그래도 부득불 먹을 냥이면 몸 상태를 생각해서 가려서 드시는 것이 좋습니다.
가령 몸에 찬 기운이 느껴지면 인삼, 홍삼, 영지버섯, 벌꿀 음료가 좋구요. 반대로 몸에 열이 많이 느껴지면 녹차, 포도, 알로에 류의 음료가 좋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좀 답답하거나 소화불량의 느낌이 들면 탄산음료가 좋습니다. 쌰아~ 발하는 탄산의 발산효과가 그러한 부부분을 풀어주니까요.
맥주 선전을 보면 광고모델이 나와서 시원하게 들이키고는 “캬아~! 바로 이맛이야!”라고 소비자를 유혹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절제해야 하니 그런 기분을 느껴보기는 힘들지요.
그런데 그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은 차가운 탄산음료의 종류지요. 무더운 불빛 더위의 한 여름날, 운동이나 노동을 한 후에 비 오듯 땀이 흐를 때 한 컵 마시는 탄산음료는 온 몸에 시원함과 짜릿함을 느끼게 해 주지요.
그런데 그렇다고 그 놈을 자꾸 마시면 금세 질리고 몸도 병들고 맙니다. 아시죠? 여름날 탄산음료나 빙과류를 많이 먹으면 몸에 양기가 손상을 입어서 아랫배가 사르르 아프고 소화기 장애가 일어납니다. 이럴 때는 약국에 가서 양기를 보하는 간단히 광동탕이나 쌍화탕 종류를 두어 병 사서 드시면 금세 좋아집니다.
이렇듯 탄산음료나 라면과 같은 음료나 음식은 가끔 먹으면 짜릿하고 맛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조금만 계속 먹으면 금새 질리고 신물나 도저히 먹지 못하고, 또 몸에 이상과 병을 유발합니다.
그제서야 담백한 물과 늘상 먹는 밥이 늘 필요한 것이요, 최고요, 좋은 것임을 알게 됩니다.
제가 오늘은 왜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가끔은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물과 같은 담백하나 몸에 좋고 꼭 필요한 것이 아니 자꾸만 짜릿한 사이다와 같은 것들을 추구함을 보게 됩니다.
섬기는 교회에 충실하며, 주를 사랑하며 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기도하며, 평범한 일상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성령 안에서 성령을 따라 의롭게 살려 애쓰는 것이 가장 신앙을 튼튼하게 하는 기초요, 기본이요, 나아가 성화까지 이를 수 있는 뿌리인데, 자꾸만 더 짜릿한 것들을 추구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예언과 꿈과 환상, 유익하고 필요하긴 하지만 결코 본질이 아닌 은사적인 부분들에 치중하고 그런 곳에 현혹되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때로는 특별한 자들의 구원이나 임박한 종말사상등의 짜릿함에 현혹되어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성은 마치 물이 아닌 사이다를 자꾸만 마시는 것 같아서 병들고 그릇된 신앙으로 흐를 개연성이 많습니다.
섬기는 교회에 충실하며, 주를 사랑하며 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기도하며, 평범한 일상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성령 안에서 성령을 따라 의롭게 살려 애쓰는 것이 가장 신앙을 튼튼하게 하는 기초요, 기본이요, 나아가 성화까지 이를 수 있는 온전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도 그렇듯이 그런 가끔의 짜릿함의 갈증은 교회집회나 개인 혹은 공적 기도회 시간을 통하여 얼마든지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사모하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은사와 체험도 넉넉히 허락하십니다. 불같이 기도하면 불같은 능력도 주십니다. 굳이 그런 교파나 류에 휩쓸려 온통 사이다를 마시며 병들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단 교파나 잘못된 교회의 흐름을 역사적으로 보면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특별한 자의 구원이요, 목회자나 지도자 자신의 신격화요, 임박한 종말론을 강조한 위기와 긴장 조장이요, 다른 사람들의 신앙관이나 생각에 관해서는 문을 열어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알의 약을 먹다가 두 알을 먹으면 그 감도에 어떤 신선한 충격을 받을 수 있지요. 그래서 일반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이 아닌 특별한 자의 구원, 아주 높은 수준의 행위를 통한 구원을 말하면 짜릿하거나 신선한 충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물론 성경이 또한 행함이 없는 믿음이 너를 구원하겠냐 반문하며 참된 믿음을 요구하며 믿음과 행함의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기본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이단이나 그런 경향성의 집단은 물처럼 본질이요 기본이요, 너무나 중요한 보편적 성경말씀이 아닌 꿈과 환상, 예언과 각양 은사, 그리고 임박한 종말론으로 긴장을 조성하여 현실도피적인 신앙을 유도합니다. 성경 말씀도 가장 중심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중심이 아닌 그런 현상적이고 종말론적인 것들만 발췌하여 사용합니다.
기독카페들도 둘러보면 가끔 이단의 문제가 있어나 그런 경향성이 있어 보이는 곳들도 있더군요. 꿈, 환상, 예언 등과 은사 등의 현상적인 것들에의 편중, 예언과 계시를 빙자한 목회자 자신의 신적 특별화, 임박한 위기적 종말론 강조, 이런 곳들은 대부분 다른 목회자나 성도의 일반적인 신앙의 글 올림은 전혀 닫혀 있지요. 자신들의 글로만 세뇌해야 하니까요. 이런 곳은 유의하여 잘 살펴보시며 분별하셔야 합니다.
참된 목회자나 지도자는 겸손합니다. 설령 아무리 엘리야 같은 능력을 받았다 할지라도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거나 나타내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드러내기를 피하시며 종용히 행하시던 예수님님처럼 자신을 낮추고 겸손합니다.
그러나 이단이나 이단성의개연성이 있는 곳에는 목회자나 지도자 자신이 스스로 온갖 예언과 계시를 빙자하여, 자신을 특별화 신성화합니다. 그래야만 신도들을 맹목적으로 맹종하게 하고 마음껏 부릴 수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그러한 곳이나 집단은 경계하셔야 합니다.
사람은 다 사람입니다. 겉으로 하늘에서 불을 떨어지게 하는 능력이 있을 지라도 속에는 누구나 검고 썩은 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이 신성하다 말할 수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13장을 보면 종말에 짐승도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여 사람도 현혹하며, 마태복음 7장에서는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할지라도 구원조차 받지 못할 수도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이다와 같은 그런 현상들에 너무 집착하지 말며, 현혹되지 말며 쫓지 마십시요. 참된 능력은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가는 능력이요, 사랑의 삶입니다.
우리 자신이 자신을 잘 알다시피 인간의 본성은 다 타락하고 썩어 거기서 거기입니다. 성령 안에서 때때로 선을 행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살아있는 시간만큼 우리는 마음과 말과 행동으로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가 어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스스로 자신을 특별화 신성화하며 교만할 수 있습니까.
참된 높임과 권위는 스스로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자신은 낮추고 낮추어도 존중을 받아야 할 목회자나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높여 주십니다.
참된 목회자와 참된 능력은 말씀대로 살아감과 사랑과 섬김의 삶, 그러나 이단의 지도자는 그러한 참된 삶은 희생의 삶은 살기도 싫고 살 수도 없기에, 자꾸만 현상적인 것들, 예언과 계시를 빙자하여 스스로 자신을 특별화, 신격화, 우상화합니다. 이단의 공통된 특징 중 하나이지요. 그러므로 그러한 교회나 집단이나 무리는 경계하셔야 합니다.
공산주의가 침투할 때 그들의 전략전술이 그러하듯, 이단도 겉모습은 그럴 듯 합니다. 이단인지 아닌지 구별도 모호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특별화 신성화, 특별한 자들의 구원, 임박한 종말론, 보편적인 말씀의 원리인 하나님 사랑과 말씀보다 자꾸만 꿈, 환상, 예언 등의 각종 은사의 현상적인 것들에 치우치고 있으면 이단이거나 이단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는 곳을 보시면 됩니다.
신앙이란 일종의 영적인 사로잡힘이라 이단이나 잘못된 흐름의 신앙교파에 빠져도 그 속에서 자신은 일종의 사이다가 주는 짜릿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병들어 갑니다.
그래서 명석한 대학교수도 사람의 육신은 절대 죽지 않는다는 영생교에 빠지고, 정상적인 이성을 가진 사람도 날짜가 지정된 종말론이나 신천지와 같은 이단흐름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지요. 일종의 영적인 홀림입니다.
임박한 종말론으로 인한 설침이 왜 필요합니까. 우리의 죽음, 곧 개인의 종말이 곧 자신에겐 우주적 종말과 같은데, 언제 어디서나 죽음 앞에 서 있는 우리에겐 하시가 종말인데,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는 말씀을 좇아 늘 경성해야지요. 늘 기름준비 해야지요.
그러므로 늘 깨어 영적으로 분별하며, 별스런 맛이 없이 담백하나 물과 같이 참되고 보편적이며 튼튼한 진리의 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며, 자꾸만 사이다와 같은 짜릿한 현상들을 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참된 성령 안에서의 능력과 생명은 꿈과 환상이나 예언 등의 각종 현상적인 체험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의와 희락과 평강이며,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이며, 사랑과 섬김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섬기는 교회에 충실하며, 주를 사랑하며 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기도하며, 평범한 일상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성령 안에서 성령을 따라 의롭게 살려 애쓰는 보편적이고 평범한 경건생활에 성실하십시요. 그것이 가장 신앙을 튼튼하게 하는 기초요, 기본이요, 나아가 성화까지 이를 수 있는 온전입니다.
마22: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마22: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마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